여주에서 산게 34년 이다,
몇년을 길수리 를 지루하게 하더니 여주서 장호원 길 중간까지 이렇게 길이 뻥 뚤렸다.
이길은 나 혼자 다니는 길 처럼 한적해 여주 읍내에도 내 실력으로 10분이면 주 파를 한다.
격세 지감이다.
30년 세월을 거슬러 여주서 내가 사는 곳 까지 버스는 하루에 4번 다니고 그나마 자갈길이라 털털거려 읍내에 다녀옴 종일 몸이 흔들리고 뒤꼴이 깨지는 듯 싶었다.
어디를 가려면 경운기 타고 1,5키로 를 타고 오거니 아님 걸어서 아침 새벽 버스를 타러 식전 공복에 종종 걸음을 걸어
야 통학생이 잔뜩 탄 만원버스를 타고 읍내로 가야 했다.
지금은 작지만 내차로 읍내까지 가고 인터넷도 들어오고 문명의 이기를 마냥 즐기고 산다.
어젠 여주 오일장이라 저녁 나절에 설 쇠기 마늘도 사고 동태 포도 사고 어적도 사러 씽....달려 한시간 만에 여주를 다녀왔다.
천지가 개벽을 한 세상을 살고 있다.
그전 같음 새벽에 나서 버스를 타러 가거나 남편이 일이 뜸한 시간대에 졸라 털털 트럭 얻어 타고 장 에가 천천히 장 구경도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 처럼
생선 토막사고 괴기 사고 애들 양말사고 뒤돌아 와야 했는데
밥 안쳐 놓고 혼자 유유자적 내가 운전해 장을 다녀오니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오늘은 이길을 거쳐 십분만 지나면 충북 음성군이 나온다.
그곳에서 한우를 기르시는 형님한테 설전에 인사를 갔다.
이곳은 복숭아 고장이다.
여름이면 복상 ( 이곳 사투리로 복숭아) 서리 내릴때 까지 늦 복숭아 앨버트 먹는 재미로 장호원 장을 자주 간다.
가차이 존경 하는 한우부인이 사시는데 우리 서로 바빠 자주 못만나 서로 시간 조율을 하고 일요일 형님 목장으로 가는길 모처럼 친정 나들이를 하는듯 싶고 좋다.
길도 역시 펑 뚤려 나만의 길이다.
성님은 73세 형부는 74 세 두분이 한우 300두를 키우신다.
너른 땅 평생을 마련하신 흔적이 역역 하다. 누우런
\\\한우들이 황금덩이로 보인다.
알토란 같은 목장 이다.
74 살의 목부 아저씨랑 경영 하시는 한국의 대표적인 농장
언제가도 참 탐나는 목장이다.
삽십년을 덧대 짓고 덧대 짓고 땅사서 늘린 목장터 노력의 흔적이 역역해 더 정감이 가는 목장이라 언제가도 좋다.
형님은 점심밥을 차려 주셨다.
집 욕심도 없시 관리사에서 사시는 두분 밀실에서 점심은 돼지 갈비찜에 콩밥을
저녁에는 연잎 넣은 찜닥을 삶아 주시어 도란 도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여성 농업인 축산인 으로 마음을 맟추었다.
오는 길에 농사 지은 검정 콩두 주시고 설탕도 한 푸대 주신다.
친정 언니 집에 오면 이렇게 가져 가는거야
언제나 시원하신 분 피를 나눈 형제 처럼 아껴 주신다.
년 매출이 10억 가량 그중에 밑소 구입비가 4억 몇천 사료비가 3억 몇천 인건비 광열비 다 제 하고 연수입이 일억이 넘는 노익장 이시다.
앞으로 10년은 더 현역에서 일을 하실 테구 100세 시대에 노후에 돈이 없서 자손들에게 손안 벌리고 당신 노력으로 사시는 모습이 나의 십년후 모습이고 싶다.
형님은 지금도 기록 하시고 경영분석을 하시고 한우의 경영 리듬을 연구하신다.
올해도 형님이랑 나는 농고 학생들과 귀농 팀을 몇 받아 교육을 해줄 요량이다.
늙어 일이 없고 돈이 없서 자식들 에게 짐이되는 삶은 안살고 싶고 고단 해도 내손으로 벌어 먹고 살자고 했다.
그리고 늙어 아푸ㅡ면 존엄사를 하고 싶으시다 하신다.
올 가을에 형님이랑 저랑 부산으로 가서 카페리 타고 후쿠오카로 가서 구마 모도 현 와규 농장과 져지종 농장에 벤치마킹 하고 온천욕 하고 오자고 약속 했다.
우리집에서 삼십분 이면 이곳에 올수 있지만 난 이곳에 일년에 한두번 박에 못 온다,
사는게 바빠서
모처럼 친정 언니 보듯이 따듯한 두분 밀실에서 담소하고 충전받고 기운 받고 잘 쉬다 왔다.
이분의 삶이 나의 멘 토 이시기에
요즘 몸이 않좋아 꾀를 부리다 정신 을 가다 듬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