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일기

회상

달진맘 2006. 7. 17. 19:50
LONG
내 나이 30살에 두 남자를  꼬득여(?)  무작정 보따리를 쌋다.
오월 논매미에 물이 그득하고 개울에서는 올챙이 밥이 둥둥 떠다니고 송사리 헤험치는  개울길 따라 시오리길를 걸어 다녔다.
동네 작은집에서 기거하면서 산속 목장터를 송진 끈적 걱리는 송충이 손 꼬락만 한 것이 꿈틀대는t소나무 등걸이를  잘라 냈다.

목장터가 간신히 장만되지  산속에 움막을  쳤다.
시오리 길을 다니는 것도 아깝고 아침 일찍부터 나무뿌리 한나라도 더 뽑아 내야겟기에...

따비꽹이와 손톱으로 소나무를 짤르고 아카시아 나무를 뿌리를 뽑아냈다.
손에 물집이  잽히고 온 몸은 헌집 나듯이 벌레에 물려 따갑고 가려웠다.
텐트속에 밤에 등을 누이면 냉기가 올라와 아침이면 몸이 무거워 얼굴은 퉁퉁 부웠섯다.
전기도 식수도  없는 하늘만 달랑 보이는 산속  삼십년생   리기다 소나무하고 아카시아 만이 무성 했다.

개울가 작은또랑에서 쌀씯고 물 받아 먹고 나뭇가지 주워  냄비가 시커매 지도록 냄비 끄슬려 밥익혀 먹엇다.
개울물 길어 쌀 씻다가 보면 하얀 밤꽃 이 뽀글거리는 아가씨 머리마냥 바람에 요동치고 바람결에 싸한 밤꽃냄새가 첫사랑 얼굴에서 나는 스킨향으로만 느껴 졌다.

우리 사는꼴  보러 머리에 캔 감자 밑반찬 담아오신 집안 어른 들 한심하다고 불쌍하다고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께  측은한 눈빛을  보내셨다.

남들 눈에 한심한 짖거리로 보이 겟지만 난 꿈에 부풀었다.
그래 10년만 버텨보는 거야...
10년후엔  서울 것들이 다른짓을 했어 라는 소리 듣게 될것이라 고 확신하면서  못들은척 했지만
난 역시 치마 두른 여자일까???
이듬해부터 아파트 팔아 산 소들이 본전도  못 건지는  악 순환 속에  설상가상으로 한우를 젖소로 바꾸는데 한우2마리에 젖소 1마리인데 그것도 바가지를 써서  3마리중에 1마리는  홀스타인 종 기초등록도 안되고 한 마리는 초산이 아닌  3산짜리  유부녀였다.
s우유에 정 조합원으로  거금을 들여 기입신청을 했지만  잘못 일처리한 남자를 실수로 우유가 남는다 아우성 치던 어느해에는 분유를 우리집 한달 유대에 10일치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 참담하고 아득함이란 끝이  없섰다.
사료 값도 주고 목장을 경영해야하는데 올말졸망 공빱 먹는 식속들은 많지 생활비가 없서  장엔 가 보자도 못하고   한해를 보내섰다.
둘째 아이를 임신중인데 분만한 병원비가 걱정 되서 날밤을 새우던 시절 이엇다.
의료 보험이 안 되는 때 였다.

친정 어머니 생활비 쪼개   젖소 사주신게 있는데 그 후손이 지금 우리집에서 최장수하는 오순이 엄마 되는데 그 아이가 아들을 나아준 것을 비육을 시켯다.
수송아지는 키워 비육시켜  엄마를 드리고 암놈을 엄마몫으로  키우기로  했섯다.
친정엄미 나중에 형편되면 갚으라면서 수놈비육 시킨것을 키워서 아이 놓으라 하시면서돈 걱정에 새카만 얼굴에 밤잠 못자 까칠한 나에게  살길을  주셧다.

답답하고 깝깝함이란 ...
하늘이  노오랗고 꺼찔 듯 보였던 그 암담햇던 시절...

큰아이  돌 지나 아장아장 것는데 그 어린 것한테 이뿐 옷 한벌 제대로 사 주지 못해 아이아파 병원에 가면 꾀재재하게 흙무치고 온 것은 내 아이뿐이엇다.
서울서 파견나온 의사 내 몰골을 보시더니 제일로 고생하는게 농부라며 축은해하면서 병원비도 감해주고 영양제도 주시고 햇다.
산모는 잘드셔야 합니다.
농부들은 애국자이십니다..
둘째 임신중인데 고기가 환장하도록 먹고싶어도 선뜻 푸춧간엘 가지를 못했다.
못 견딜것같은 시간을 꽤 여러 달 보낸 듯 싶다.

아이놓으러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 측은한지 어려우신데 파파가 비육소 팔아 가져온돈만  받고 나머지 병원비는 단산하면 주는 정부보조금 혜택 받게 해주어 작은아이 지아를 낳앗다.
바닥이라던 소값이 치솓고  우유가 모자란다고 어느날부터 고자세이던 꼬빼기도  안보이던 유업체 분들이 웃돈을 들구 와서는 이웃들을 하나둘씩 모셔갓다.

그런 고비를 몇번 넘겻다.

오늘 지역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와서 지난날을 남의 말 하듣이 덤덤하게 말을 하면서 새삼 틀추어 내기도 싫은 옛 이야길를 끄내는 것은  돌구 도는 세상사 이치를 깨달은 듯 싶어서다.

요즘 텔레비전도 뉴스도 인테넷도  집속하고 보고 싶지가 않음 에서이다.
삼사 개로 분열되서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 과격하고 허연 우유가 퍼부어 쏱아지는 장면과  우유를 버리는 참담한 심정의 낙농가들 의 처참함이  내 아픔기억이 되 살아 나서 마치 내아팟던 시리던  먼 엤날의 환부를 들여다보는 것r 같아 마음쓰라려서이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중심 축이 없시  분열  됨이 그렇고 책임운운하면서 앞서서 일하시던 분들에게 모조로 책임 전가를 하는 글을 인테넷에서 보면은 정보의 자유로움이 무섭고 두렵기조차하다.

오죽이나 답답하고 막막하면 저런 글이 올라오나 싶다가도 이래도 우리들은 희망을 버리지말고  견뎌봐야 하는데 말이다.

어려움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괸 찮은 시절이 왔드랬다.
그 당시에는 그것조차 몰랏지만 지금 회상해보니  어려움을 견디면 좋은 시절도 반드시 있섯다.
그래서 고진 감래라 했쓸까???

아이는 자라서 지 인생 찾아갈 나이가 되고 난 생을 정리할 나이가 되어가고..
세월의 무상함속에  어제 옥수수 밭에 어저귀를 뽑느라  아줌니 들이  왔다.

새참을 만들어 가지고 밤나무 그룻 터기엔 밤꽃이 이제 꽃술을 살짝 내 밀엇다.
하얀 밤 꽃술 말 없시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를 말해준다.

황량한 너른 옥수수 밭에 제초가 안되 널부러진 풀밭과 얄밑도록 기어 나오는 어저귀 에게 화풀이하듯이 뽑아냈다.

뻐꾹뻐꾹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만 뒷전을 때린다.

견디어 봅시다.
살아가 지 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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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30살에 두 남자를  꼬득여(?)  무작정 보따리를 쌋다.
오월 논매미에 물이 그득하고 개울에서는 올챙이 밥이 둥둥 떠다니고 송사리 헤험치는  개울길 따라 시오리길를 걸어 다녔다.
동네 작은집에서 기거하면서 산속 목장터를 송진 끈적 걱리는 송충이 손 꼬락만 한 것이 꿈틀대는t소나무 등걸이를  잘라 냈다.

목장터가 간신히 장만되지  산속에 움막을  쳤다.
시오리 길을 다니는 것도 아깝고 아침 일찍부터 나무뿌리 한나라도 더 뽑아 내야겟기에...

따비꽹이와 손톱으로 소나무를 짤르고 아카시아 나무를 뿌리를 뽑아냈다.
손에 물집이  잽히고 온 몸은 헌집 나듯이 벌레에 물려 따갑고 가려웠다.
텐트속에 밤에 등을 누이면 냉기가 올라와 아침이면 몸이 무거워 얼굴은 퉁퉁 부웠섯다.
전기도 식수도  없는 하늘만 달랑 보이는 산속  삼십년생   리기다 소나무하고 아카시아 만이 무성 했다.

개울가 작은또랑에서 쌀씯고 물 받아 먹고 나뭇가지 주워  냄비가 시커매 지도록 냄비 끄슬려 밥익혀 먹엇다.
개울물 길어 쌀 씻다가 보면 하얀 밤꽃 이 뽀글거리는 아가씨 머리마냥 바람에 요동치고 바람결에 싸한 밤꽃냄새가 첫사랑 얼굴에서 나는 스킨향으로만 느껴 졌다.

우리 사는꼴  보러 머리에 캔 감자 밑반찬 담아오신 집안 어른 들 한심하다고 불쌍하다고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께  측은한 눈빛을  보내셨다.

남들 눈에 한심한 짖거리로 보이 겟지만 난 꿈에 부풀었다.
그래 10년만 버텨보는 거야...
10년후엔  서울 것들이 다른짓을 했어 라는 소리 듣게 될것이라 고 확신하면서  못들은척 했지만
난 역시 치마 두른 여자일까???
이듬해부터 아파트 팔아 산 소들이 본전도  못 건지는  악 순환 속에  설상가상으로 한우를 젖소로 바꾸는데 한우2마리에 젖소 1마리인데 그것도 바가지를 써서  3마리중에 1마리는  홀스타인 종 기초등록도 안되고 한 마리는 초산이 아닌  3산짜리  유부녀였다.
s우유에 정 조합원으로  거금을 들여 기입신청을 했지만  잘못 일처리한 남자를 실수로 우유가 남는다 아우성 치던 어느해에는 분유를 우리집 한달 유대에 10일치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 참담하고 아득함이란 끝이  없섰다.
사료 값도 주고 목장을 경영해야하는데 올말졸망 공빱 먹는 식속들은 많지 생활비가 없서  장엔 가 보자도 못하고   한해를 보내섰다.
둘째 아이를 임신중인데 분만한 병원비가 걱정 되서 날밤을 새우던 시절 이엇다.
의료 보험이 안 되는 때 였다.

친정 어머니 생활비 쪼개   젖소 사주신게 있는데 그 후손이 지금 우리집에서 최장수하는 오순이 엄마 되는데 그 아이가 아들을 나아준 것을 비육을 시켯다.
수송아지는 키워 비육시켜  엄마를 드리고 암놈을 엄마몫으로  키우기로  했섯다.
친정엄미 나중에 형편되면 갚으라면서 수놈비육 시킨것을 키워서 아이 놓으라 하시면서돈 걱정에 새카만 얼굴에 밤잠 못자 까칠한 나에게  살길을  주셧다.

답답하고 깝깝함이란 ...
하늘이  노오랗고 꺼찔 듯 보였던 그 암담햇던 시절...

큰아이  돌 지나 아장아장 것는데 그 어린 것한테 이뿐 옷 한벌 제대로 사 주지 못해 아이아파 병원에 가면 꾀재재하게 흙무치고 온 것은 내 아이뿐이엇다.
서울서 파견나온 의사 내 몰골을 보시더니 제일로 고생하는게 농부라며 축은해하면서 병원비도 감해주고 영양제도 주시고 햇다.
산모는 잘드셔야 합니다.
농부들은 애국자이십니다..
둘째 임신중인데 고기가 환장하도록 먹고싶어도 선뜻 푸춧간엘 가지를 못했다.
못 견딜것같은 시간을 꽤 여러 달 보낸 듯 싶다.

아이놓으러 병원에 가니 의사 선생님 측은한지 어려우신데 파파가 비육소 팔아 가져온돈만  받고 나머지 병원비는 단산하면 주는 정부보조금 혜택 받게 해주어 작은아이 지아를 낳앗다.
바닥이라던 소값이 치솓고  우유가 모자란다고 어느날부터 고자세이던 꼬빼기도  안보이던 유업체 분들이 웃돈을 들구 와서는 이웃들을 하나둘씩 모셔갓다.

그런 고비를 몇번 넘겻다.

오늘 지역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와서 지난날을 남의 말 하듣이 덤덤하게 말을 하면서 새삼 틀추어 내기도 싫은 옛 이야길를 끄내는 것은  돌구 도는 세상사 이치를 깨달은 듯 싶어서다.

요즘 텔레비전도 뉴스도 인테넷도  집속하고 보고 싶지가 않음 에서이다.
삼사 개로 분열되서 생존권이 달린 문제라 과격하고 허연 우유가 퍼부어 쏱아지는 장면과  우유를 버리는 참담한 심정의 낙농가들 의 처참함이  내 아픔기억이 되 살아 나서 마치 내아팟던 시리던  먼 엤날의 환부를 들여다보는 것r 같아 마음쓰라려서이다.

더욱더 안타까운 것은 중심 축이 없시  분열  됨이 그렇고 책임운운하면서 앞서서 일하시던 분들에게 모조로 책임 전가를 하는 글을 인테넷에서 보면은 정보의 자유로움이 무섭고 두렵기조차하다.

오죽이나 답답하고 막막하면 저런 글이 올라오나 싶다가도 이래도 우리들은 희망을 버리지말고  견뎌봐야 하는데 말이다.

어려움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괸 찮은 시절이 왔드랬다.
그 당시에는 그것조차 몰랏지만 지금 회상해보니  어려움을 견디면 좋은 시절도 반드시 있섯다.
그래서 고진 감래라 했쓸까???

아이는 자라서 지 인생 찾아갈 나이가 되고 난 생을 정리할 나이가 되어가고..
세월의 무상함속에  어제 옥수수 밭에 어저귀를 뽑느라  아줌니 들이  왔다.

새참을 만들어 가지고 밤나무 그룻 터기엔 밤꽃이 이제 꽃술을 살짝 내 밀엇다.
하얀 밤 꽃술 말 없시 세상사 돌아가는 이치를 말해준다.

황량한 너른 옥수수 밭에 제초가 안되 널부러진 풀밭과 얄밑도록 기어 나오는 어저귀 에게 화풀이하듯이 뽑아냈다.

뻐꾹뻐꾹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만 뒷전을 때린다.

견디어 봅시다.
살아가 지 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