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사랑
집안 장조카가 올라 오셨다.
그는 나보다 한살 많은 친구같은 조카이다.
지난 주에 어머니 즉 나에게 팔촌 올케가 돌아 가셨고 향년 85세
그다움 날 미국서 돌아가신 분의 시동생이 한줌의 재가되어 고향땅 조강지처 옆에 묻치 셨단다. 향년 93세
기막힌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웃엇다 울었다,를 반복해야 했다.
오늘 사진과 글은 돌아가신 팔촌 오라버니 또배기 오빠와 그분의 의 아내의 망부가를 쓰고 싶어서이다.
육촌 당숙은 생전에 마누라를 다섯을 얻으 신듯 싶다.
구분이 이 돌아가시기 전에 삼십년전쯤 된다 그때도 며느리 보다 젊은 아내를 얻어 사셨는데
당숙은 젊어 조강지처가 맘에 안든다고 후실을 보시고 아들 둘과 딸둘을 나으시고
전처 소생으로 4남매 을 나으시었 다고 어릴적에 시골집에 가면 올기종기 조씨 집성촌 안에서 여인들이 모여 다들 친척간 이지만
여인들 대화는 소실 과 정실 사이에 소소한 갈등 이 주제 였다.
당숙 작은댁이 아둘들 둘을 년 년 새응로 나아 아명이 또배기 재배기
어릴적부터 난 나이 많은 오빠 들을 보며 자 랐섰다.
또배기 오빠는 육군 장교출신 키고 훨칠했고 잘생겼든것 같았다.
오빠가 결혼을 한 신부는 이웃동네 장호원댁이라 댁호를 불려 작년에 돌아갈때까지 장호원 댁 올케 였다.
두분은 서울 신당동에서 사셨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아버지 치과 병원에 갔다
멋진 부부를 만났다.
나이많이 오빠와 올케라 인사를 시켜 주시는데 올케가 뽀족구두에 고데를 하고 투피스를 입은 세련된 서울 귀부인이었다,
동네 시골집에 큰일이 있서 가면
장호원댁이 당연 여인들 입에 올랐다.
멋쟁이고 도도하고 거만한 부자집 마나님이라고
늘 부부는 시골집에 올려면 동부인으로 다녔고 정이 좋아 슬하에 자식이 없다고 수군거렸섰다.
그러다 업둥이로 사내아이을 얻어 키우고
부부는 늘 얻어 키운 아이 입양된 아이가 마음에 걸려 미국 이민을 꿈 꾸었었다.
미국가서 세식구가 단란이 사는게 멋쟁이 올케의 꿈이 었다.
몇번의 미국 이민을 꿈꾸다 사기도 맞고 힘들게 오라비만 미국으로 먼저 들어갔다.
가서 영주권 취득하고 아내와 어린 자식을 불러 오겠다고
그리 장호원 올케는 48년을 남편을 기다리며 살았다
입양한 양자를 데리고...
간간히 들려오는 소문이
미국에 전화를 걸어 조 아무개를 찾으니 내가 그의 아내라는 전화 목소리에 기가 차 넘어자빠지고
아마도 시민권 있는 여성과 결혼해 살다 이혼해 다시 본국에 아내를 초청할거 라는 희망을 갖고 참고 기다린듯 싶었다.
정이라는 게 무섭기만 하다.
미국여인은 오라비 보다 5섯살이 많은 사별한 과부인듯
그아내가 치성으로 오래비를 랑 사랑을 했는가 미국에서 자리잡고 보내온다던 초청장은 끝내 오지를 않앗다.
한국에 장호원 올케는 점점 말이 없서지고 기가 죽어 아들 하나보고 살아 오며 태평양만 바라보고 산듯 싶었다.
나이 들어가는 올케는 점점 말두 적어지고 예전에 가고 만장 하던 멋쟁이 사모님이 더는 아니였다.
정능 골짜기에서 장호원 댁 환갑잔치를 한다기에 일부러 갔다,
산골짜기 에서 물이 시원하게 내려오는 환갑 진치날
친정 동생들이 혼자 버려진 언니가 가여워 차려준 환갑날
데려다 키운 아둘이 엄마를 업고 덩실 덩실 춤을 추었고 다들 그의 사랑 을 알기에 진치 국수만 목이 메게 먹고들 왔다.
어느핸가
재백이 아들이 미국에 갔다 주소를 들고 찾아가니 미국아내랑 재혼해서 살갑게 살고 있섰고
한국에 돌아갈수 없다 하드라며 또배기 오빠는 체념을 했든지 미국 연상의 아내의 헌신적인 사랑에 빠져서
두고온 아내에게 미안 하지만 어쩔수 없다 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국에 서 양자로 입적된 아들이 혼인을 한다길레 갔섰다.
남편없는 혼주석에 안자 며느릴 절을 받은 올케
측은해 다들 한소리를 해댔다.
그의 잔치대절 버스를 타고 내려오면서 집안 아낙들은 많이 궁금해 했다.
부부 금실이 그리 좋더니 왜 미국가서 새장가를 가서 산다지
미국부인이 재혼한 남편을 금쪽 같이 사랑 한다면서
살다 이런 생이별도 있네 하며 다들 소곤 거렸다.
그제 오빠는 아흔 넷에 한줌의 재가되어 백골에 담아 손주가 들고와 작년에 먼져간 조강치처 와 합장을 했단다.
육년전에 홀연 한국에 다니려와서
종손내외 에게 부탁을 했단다.
내가 조상님과 문중에 죄를 짓고 할만이 없지만
미국법이 바뀌어서 당신 사는곳에서는 본인이 원하면 죽고난후 화장해서 한국에 묻칠수 있으니
내가 죽은 선산에 묻치고 싶노라 하셨단다.
뼈를 가져 온 이는 미국아내의 손주
어릴 적에 늘 새할아버지가 키워주셨고 학교에 데려다 주시고 데려오시고 자상하게 해주셨단다.
정이 깊어 ...직접 할아버지를 마지막 장례를 치루어 드리러 와서 연실 울드란다.
화장을 한 유골함을 끝내 안내 주시면서 함께 있기를 고잡하는 미국 아내는 98세
이틀 밤을 곂에 두시다 남편의 유언 대로 한국으로 보내며
전과정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내라 하셨단다.
장손은
어머니를 장례 모시고
똑같은 수준으로 양야들이랑 비석이며 상돌 등 준비하여 격이 삐짐 없시 숙부의 유언 대로 해드렸단다.
손자의 며느리 친정 부부가 부산서 와서 장례에 참석을 하고
48년을 미국을 가기를 기다리던 올케는 죽어서 남편을 옆에 모셨다.
자손들이 두분의 열열한 사랑을 존중하고
두분의 유언대로 해드렸다고 종손은 두시간을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다 갔다.
아름답고 서러운 이야기
주마등처럼 기억이 난다.
멋쟁이 장호원댁 젊은 시절 도도한 멋쟁이 올케의 모습
남편을 미국으로 보내고 점점 기가 죽어 살아가는 모습
나 결혼식날 재배기 또배기 올케들이 오시어 함도 받아 주고
아버지 환갑날 밤세워 집안이 모여 놀던 모습
전부인이 하고 산세월보다 미국아내랑 산시간이 더길다는 미국 손주 말처럼 48년을 기다리다 치매가 길려
투병하다 입양아들 손으로 장례를 작년에 모셨 다고
끝내 죽어서 남편과 합장을 한 올케도 미국에 묘지를 쓰지 못하고 한국으로 보내기 싫어 안타깝게 했던 미국 아내도 다 측은하고 불쌍 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두여인의 사랑이 축은해서 울었다.
남편을 뺏기고 기다림을 산세월 48년
그동안 화한이 남아 있섰슬 큰 올케 장호원댁
키워준 할배를 마지막 가는 길을 베웅한 손주는
아주 예의 바르고 멋진 젊은이 라고 칭송을 했다.
연실 울며 미지막 가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는 손주의 인품도 남다르다고 종손을 침이 마르게 칭송을 한다.
장례가 끝이나고
한국에 아들과 미국에 손주는 그동안 전화를 의논을 했고
장례후 종손이 식당으로 모셔 극직한 손님 대접을 햇고
한국에 아들이 호텔까지 모셔다 드렸고
다음날 부산 처가로 가서
열흔 정도 쉬었다.
미국으로 돌아 갔다고 했다.
어릴적에 아바지를 미국으로 보낸 아들도
얼마나 아버지 정을 주리며 그리며 살았슬까 싶었고
재혼한 할머니 덕분에 새할아버지 사랑을 뭇잊어 한국땅까지 할배의 유골을 가져와 생전 할배의 유언대로 보내주신 미국 할머니나 울면서 장례를 치운 손주나
다 불쌍하고 씁쓸 했다.
사랑인연이 그리 끝이 났다.
일년을 피여났는 우리집 꽃들을 찾아
또배기 오빼 내외 그리고 미국아내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슬프고 애절하지만
이제 내바램은
48년을 망부가를 그리며 눈물 짓던 장호원 댁의 눈물이 이제 고만 먿추기를 바라고싶다.
사랑은 참 슬픈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