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랬섰나?
무덥다
바람 한점 없고 더운데 그래도 해야할일을 해야지 싶어 이른 아침에 체험장으로 밥을 하러 갔다.
집에서 복닥이기 불편해 이른 아침에 집을 나가니 는데 후꾼하다,
더위가 가서야지 집에는 에어콘두 없고 불끈달아 뜨거워 잠을 못 이룬다.
그래도 시절을 알아서 범부채 꽃이 피여났다.
처음에 피여난 꽃들은 다 이뿌지만 이꽃은 부채모양의 이파리면서 꽃도 범무니 처럼 알록달록 하니 조상님들이 이름은 잘 지으신것 갇다.
아침 새벽에 꽃색이 더 곱다.
오늘은 멘토링 마지막 날이라 사업 계획서 쓰는거 발표하게 하니 엉망이다.
어제 종일 안쳐 놓고 일러 주었지만 어린 학생들 감을 못 잡는다.
더욱 여자학생들 인데 집에서 받는 유대가 얼마인지 자기집 목장 부지가 얼마인지도 소값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아이 잡고 쇠귀에 경읽기를 한듯 싶었다.
그동안 실습했던거 제품 꺼내서 포장 하고 먹는 법 보관법 일러주고
숙소 정리 하고 오라고 보냈더니
문자만 달랑 간다고 하고 가 버렸다.
순간 많이 섭섭 하고 무엇부터 잘못 된건지 이해가 안되어 종일 우울했다.
여학생 이라고 하루 얼마짜리 방에서 재우고 직접 세끼 따순밥 지어 먹이고 갑갑할해하면 면에 데리고 나가 간식 사주고 근동 맛집 순레 하며 사먹이고 진심으로 대해주었건만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 전수해 주고 싶어 졸려 하기 싫다고 색색 하품만 하는것 쉬라고 숙소에서 쉬라고 하면서 토딱 듣이 아이둘을 지도 했건만
우죽이나 집에 가고 싶엇으면 데릴러온 부모 차에 타고 그냥 가 버릴수가 있나 싶어 몹씨 불쾌 했다.
나도 그런 우를 범했다 싶어 곰곰 생각해 보았다.
딸애가 일본에서 방학중에 목장으로 견학을 간 다면 가는 집 으루 주소를 알아내어 정성껏 오미야게를 준비해 보냈섰다.
김치도 담구어 보냈고 김도 맛난걸으로 사서 보내고 그댁에서 자시고 싶은 한국요리를 만들어 보내기도 했고
방학이면 찾아가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곤 했다.
훝날에 한국에 딸애 친구나 어머니가 오시면 꼭 서울까지 가서 식사를 대접하고 오곤 했섰다.
지금도 그집 들과는 딸과는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인맥을 갖고 있다.
인연을 소중이 하는 나는 그리 하고 싶었고 최선을 다해 내가 고생하고 얻은것 하나라도 더 학생들에게 일러주고 싶었다.
더 감사한 것은 북해도 윘지방에서 하루 300두를 착유 하는 집 외동딸이 있는데 그집에서 작은애가 로타리 팔라를 견학 하러 가 있다가
오비히로 다이끼 지방으로 실습을 한달 간 가 있게 됬다.
한국에서 어머니가 겨울이라 올수가 없자 그바쁜 친구 부모님께서 하루헬파를 내고 왕복 14시간을 운전해 눈길에 작은딸은 다이키 목장까지 데려다 주셨다.
그리곤 한국서 어머니가 못오시는 사정을 말씀 드리고 대신 친구 부모가 일정을 비우고 다녀가시면서 작은딸 실습을 잘 부탁한다고 머리를 조아 리시며 선물꾸러미를 내놓고 가셨다는 소리를 담달에 눈이 녹고 길이뚤려 늦게 인사를 가보니 그런정황을 말씀을 하시어 감격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섰다.
인사나 공치사를 받을려고 한 것은 더욱 아니지만
그래도 자식을 딸 자식을 일주일 간을 보내면서 목장 까지 데릴러 오시어 딸에게 인사도 하지 않게하고 훌훌 가시어야 했나 싶다.
대학생이면 그정도의 자기 인사는 할줄아는 나이 아니인가 싶다.
종일 망치로 한대 맞은것 같아서
내년 부터는 이일도 하지 말아야지 싶은 생각이 들어 깊게 고민중이다.
내가 너무 오지랍이 넓은것인가 묻고싶다.
어리고 세상을 몰라서 그렇가 싶다.
첫날부터 메모지나 필기도구 하나 없시 달랑 헨드폰만 들고 올적 부터
사무국에서 주의사항을 안일 러주어서 그런가 싶고
이해 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요즘 새내기들은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무엇이던지 학생 입장에서 배려를 한 일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