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일상

가을이면 도지는 병

달진맘 2010. 9. 1. 08:25

 

 

 

누구나 젊고 아름다운 청년시절에는 큰꿈을 꾸고 살고 이꿈을 이루고져 노력을 하는것으로 안다.

 

내가 다리가 불편하고 걷기가 힘이들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느낀게 초등학교 3학년 체욱시간이었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상 당시 초등학교 성적표는  수우미양가로 매겨져 오는데 수수우우하다 가로 되는게 채육시간이었다.

 

체육시간에는 교정에서 한쪽에 움크리고 안쟈 아이들 뛰는것 보고 있서야 했스니까...

 

고놈의 체육시간에 성적표만 없으면  친정아부지 자식자랑을 늘어지게 할테인데...

이맘때 음력칠월이면 할머니 기고로 아버지는  하얀모시 적삼 입으시곤 시골로 제사를 모시러 내려 오샸다.

 

환자도 안 보시고...지금말로 아부지 휴가 인셈이다.

 

 

아버지 내려오신날 저녁에는  작은집 마당에 불이 헌 하게 켜지고 전기가 안들어 올때에는 낙시터에서 불 밝히는 램프를 카바이트와 물을 넣어 성냥불을 그어대면 눈이 부셔 뜰수가 없슬정도로 밝았다.

 

그런날엔 아이들은 히히 거리면서  더 극성스레 뛰어 놀았고

집안친척들이 다모여 멍석까른 마당가에 안쟈 술추념을 하셨다.

숙모님들은 부억에 모여 기름질에 제수 장만에 바쁘고^^

 

화두가 대개 집안 경조사나 세상돌아가는 이야기이지만 촌에서사는 분들의 대화주제는 자식자랑 이었다.

 

우리딸이 일등을 햇고 우등상장을 타 왓시유^^

숙부님의 자랑질에 아부지는 덕담을 하셨다.잘 가르쳐 시집을 잘 보내고 사위를 번듯하게 보면 그것도  집안에 가운의 소치이고 좋은일이니 계집애라고 안 가르칠 생각은 말고 고등과라도  가르쳐야  한다고 누누히 말씀 하셨다.

여자애 가르치면 뭘 해요 시잡 가면 남 좋은일이고 아들 놈이나 가르켜야 하는데 공부는 할생각 안하고 미꾸리만 잡으러 다닌다고 푸념을 하신다.

 

공부을 잘해 공무원 시험이라도 봐서 농사짓지 말고 면 서기라도 해야 사는게 고생줄이 덜 할텐데 싹수가 노오랗다고 쟁쟁 거리시는 당숙...

 

사람은 열번 변하니 윽박 지르지말고 잘 키우라고 살살 달래서라도 학교를 다니게 하라는 아부지 훈계...

 

우리 딸은 뜀박질을 잘 혀서 읍내에가서 숟가락도 타 오고 공책도 탔다는  자랑 후엔 뜀빡질 잘혀  기집애가 뭔 한대요??

까지것 인물이 반반 할적에  어데 급사로 있다  시집이나 농사 안 짓는 집으로 보내면  제일이지요...

 

 

그런 날은 어떤때는 술을 드시곤 취중에  ,,불구자식인 내가 속이 상하고 걸리시는가  난 자식복이 없서 없서

한탄을 하시다 잠이 드시곤 했다.

 

내가 결혼적령기에 들어 우리부모님의 한숨은 점점 길어져 갔다.

쉰떡 치우듯이 이름을 지어야 할텐데  어쩌나 하는 근심 이신듯 했고...

 

팔자소관인지 쌀집 아주매 중매로 이웃혼사가 어른들끼리 쑥떡 공론으로 정해져갈 무렵...

나도 내삶이 지루하고 관조로워 죽을듯 싶었고  도시의 삶이 싫었다.

 

착해 보이긴 해도 용해 빠진다는 시엄니 말씀대로  남편은  부지런하고 시지육신은 건강했지만

남자로서 자기일에대한 야망이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다.

 

아무것도 안 따지고 그사람 착하다는 됨됨이 하나만 보고 시집을 보내시려는 친정부모님  애절함을 들여 들어야겠기에

한 결혼이니  애정이니 구구한 사랑이니 그런 감정은 사치엇다.

 

 

훗날에 내딸 지아가 선택한  사랑에 선선히  승락을 한 것도 내가 못해본 사랑에 대한 원한 같은게 있서서 그랫는지도 모르겠다.

 

친정엄마는 내색을 안 하시지만 평생 딸의가슴에 얼음짱 같은 차가움으로 살아온 내삶을 아시니 깐

손녀딸과    손녀 사위의 닭살 애정행각이 귀염게 보시곤 니 엄마가 너 같은 사랑을 못 해봐

평생 가슴이 불은 담고 살아서 니들 사는모습이 샘이 날꺼다..80줄 노인의 입에서 나온 그말은  아니다 싶게 정곡울 찌르는 말씀이시다.

 

 

하여간  억지 결혼을 했고 집안 풍습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결혼은 지옥이었다.

지금도 난 지옥줄에서 헤매이고 있다.

 

돌팔구는 내일을 갖는거엿고 뭄두 불편하고 크게 배운것도 없는 내가 나이는 먹어 할수 있는일은  별루 없섯다.

 

하여 선택한게 귀농 이고 젖소를 키우는 일 이었다.

남편과 난 일에 관해 공통점을 찾고 싶었고 내가 할수 있는일이 분명 있슬거라는 생각에 미쳐 29살인가에 여주로 내려왔다.

이일에 올인햇다 열신히 그들과  지냈고 소를 키웠다.

 

 

 

남편은 부지런함과 강인함은 그때부터 진가가 발휘됬고  뒤에서 조언하고 살림을 챙기고 하는 일을 맞게되었다.

 

젖소를 잘 키웠다.

특히 살림을 나고  독립을 해서 독자경영을 부부가 하게되자 운 까지 더 했는가 잘 풀렸다.

 

미군납우유를 합격하고  우유값을 다른이들보다 두배를 더받고 할시절이 2년가량 지속됬다.

경쟁력제고로 우사도 착유시설도 현대화로 하라고 당시돈 2억에 팔천만원  보조사업을 받고 길도 고치고 물도 관정을 기계로 팠고 지금의 은아목장 근간을 마련했다.

더우기 홀스타인 품평회에 그랜드챔피언도 수상을 했고 승승장구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1995년에 소를 출품시키는데 남편은 지금도 나몰라이지만 그때는 더했다.

 

더좋은 소가 더 큰목장에서 나올텐데  망신사서 하지말고 나가지 말라는 것을 우기고 우겨 경산우2마리를 골랐다.

 

탈도 내가깍고 ...다듬질도 내가하고...

 

근데 그게 대박이 났다.

 

소들이 서있는데  사람들이 몰려와 내가 출품한 소들앞에서 장사진을 친다.

지금도 친구인 일본에서온 사진사  오가와상은  눈빛이 다  반짝이면서 손짓을 한다 최고라고^^

 

진짜 최고소가 되어 그랜부 부분에 4세 경산우부분에서 상을 휩쓸엇다.

 

그렇게 상을 10년간을 내리 각부분별로 휩쓴거 갔다.

 

다음해 챔피언 부상으로 일본에 연수를 갔다.

 

가을9월 2째주인가 3째주인가 북해도에서 열리는 북해도 홀스타인 공진회에 갔다.

 

외국에 여행은 2번째인듯싶다.

 

남편은 바빠서 못가고 여인네인 내가 길을 나서는데 아이들하고 남편한테 미안했다.

 

 

지금도 사포로에가면 묵는 호텔이 있다.

 

신속에서 제멋대로 살아오다 별이 5개짜리 호텔은 딴세상 이었다.

가끔 내삶이 고질스러우면 이런 변화는 삶에 자극이 된다.

 

12층 꼭대기 바에서 밤에 술추념이 있섰고...동행한 이들 끼리

그때 메뉴판을 보고 찍은게 SEPTEMBER LOVE 라는 칵테일이다.

 

 

아름이 너무 고혹적이라 아름다워 ...

한잔 시켰는데  독 하게 콕 쏘는게 목줄을 타고 내리면서 취기가 올랐다.

 

잔 에 입술을 대고 마시는 부분에 하얀 설탕가루가 살포시 묻쳐져 있는 핑그빛 술^^

 

감미롭고 아름다웠다.

 

 

그술을 사랑하는 이와 먹엇으면  한이 안남을텐데...

혼자 마셧으니...

 

지금도 가을이면 칵테일 한잔할  친구가 그림고 그립고 또 그리움이 남았다.

 

이 그리움은 가슴속에 묻어두고 가야할듯 싶다.

 

( 아침부터 횡설수설,,, 가을이면 도지는 병이니 그리 아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