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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마 버드 여사

달진맘 2009. 9. 24. 02:33

 

 

남편이랑 나는 동물과 꽃을 좋아한다.

서울에서 태여나고 자란 남편의 고향은 용산구 청파동...효창공원 지금 숙명여대 근방..

완전 서울내기이다.

 

난  지금 청량리 미도파 백화점 자리에서  태여났고  영등포에서 자랐다.

우리 아버지는 가난한 자수성가하신  치과샌님으로 농부의 종손이신데 돌아가실적까지 장장 55년을

치과의사로 개업을하셨다.

.

지지리도 가난하여 초등학교 5학년이 학력의 전부 월사금을 못내 쫓겨 났다고  한다.

전 재산 이라 곤  예일곱 마지기의 논 농사에 손바닥 만한 밭 돼기

할머니가 살아 계시었음  일찍 서울로 도시살이를 안 했슬텐데 서모  큰집 서모 틈에 앞날이 까막득하 셧는가

 

지금의 목장터에 일제시대 사방공사를 하여 주고 ( 나무를 심는 일) 품삵을 거머쥐고

서울로 상경하여 일본사람  치과의원에 조수로 근무 하면서 주경야독으로 공부를 하셨다 한다.

검정고사로 25세에 치과의사가 되셨고 6.25때 전 재산을 불태우고

 

우찌우찌 아버지는 나이어린 엄마를만나  숟가락 몽댕이하나 들고 시작한 살림을 늘리고  늘려 사셨으니

성공을 한 삶이라 생각한다.

 

지금 목장터는 친정 아버지가 사 놓은 말림 ( 임야의 이지방  방언) 이었다.

 

아부지 열댓살 적에 이곳으로 나무를 하러 오면 아늑하고 따뜻하고  평편해  갖고 싶은 산이 었단다.

신씨네 오랜 종중산 이었는데 일제시대에 고만 팔아먹고 해방이 되어 국고에 반입어 있섰는데

운이 되었는가 아부지 평생 모은 돈으로   정부에서 불하를 받았다.

 

노인의 꿈은 자식들이 농부가 되어 사는 거였다.

 

당신은 치과의사로 부와 명에를 지고 사셨지만 허 하셨는가 입만 여시면

자연으로 가서 상업농을 하라는 말씀 이셨다,

 

돈 버는 농사 농업...

 

 

많은 시도를 하셨지만 아버지대에서는 번번히 실패를 했다.

 

직접 농사를 농장을 안 하시니 남의손에서 친형제도 형님의 뜻을 안 받아주었나 보다.

 

 남편과 남동생과 지금의 목장터 아래에 텐트를 치고 시작한 귀농 살이 내나이  30살때 이다.

꽃다운 나이에 서울서 내려와 징글징글하게 일만 하고 살았다.

 

 

젖소를 키우면서 아이 둘을 낳고 목장터를 일구면서 살았다,

늘 가난 했지만 마음은 즐거웁고 행복했다.

 

소들을 키우면서 세상을 보고 배웟고 돈도 벌었다,

그러나  한국의 낙농업 지금 고사 직전이다.

 

우유가 남고 소를강제 도살 시켜야 했고 정부정책에 의해서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낙농을 이어갈 꿈을 꾸고 있으니..

 

두딸들과 함께 자연속에서 젖소랑 살수 있는 방법으로 찾은게 관광산업과  가공 판매를 이었다.

 

 

우사를 정비하고   키가작은 풀을심고 작은동물을 가져다 놓았다.

 

 

 

 

 

 

칠면조 염소 토종닭 양 젖송아지  말 ...

 

버드는 그렇게 우리집으로 왔고

처음엔 경마장에서 사고로 버림을 받고 뒷다리 골절로 넘어지면 못 일어나고 했지만

지금은 살도 통통 오르고  건강하다.

 

 

작은 초지밭이 약2000평  그녀 혼자 유유자적 풀 뜯어먹고 놀고 한다.

 

 

 

 

 

 부부가 처음으로 지은 우사터 ...지금은 작은동물들이 살고 있고 버드는 제일 앞줄에서 살고 있다,

 

 

 젖먹이는 체험을

하기위해 어린송아지는 버드옆에서 자라고 있다.

 

 

주황색 옷을 입은 아이가 큰딸...

 

유치원 초등학교 학생들하고 엄마앞에서  말에게 당근주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어려운 시절이다.

딸이랑 나랑 남편이랑,,,

송아지값이 암놈이 5만원 숫농은 15만원 ...

세상에...

 

 

사료값은 오르고  젖소 값은 급락이고..

 

어려운시절에 살아남기위해 선택한 낙농체험 ,,,

 

 버드와  작은개들이 염소 양들이 도와주고 있다.